진보, 보수 뭣이 중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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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보수 뭣이 중한교?
  • 정관소식
  • 승인 2021.07.05 14:12
  • 조회수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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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근아 너는 진보? 보수?”

“20대의 보수화, 이준석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최근 어른들이 부쩍이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필자에게 던지곤 한다.

  터놓고 말하면 필자는 모른다. 더욱이 청년 문제를 놓고 언론사는 다퉈 기사, 칼럼으로 집중적으로 보도하는데 그다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이미 논지를 정해 놓고 시작한 기사와 칼럼에 필요한 사례를 추출해 사용한 건 아닐까 오염된 데이터를 활용해 그럴듯한 연구 결과를 내놓지는 않았을까 다양한 성향을 지닌 20대를 어떻게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쏟아지는 청년 문제에 대한 기사와 칼럼이 이제는 다소 피곤해질 지경, 그래도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 있을까 분명 우리 20대가 기존 세대와 다른 건 ‘신선한 충격’이자 ‘반란’인데, 필자도 숟가락을 살포시 올리고자 한다. 단 사견에 불과하니, 전문적인 글을 읽고 싶었던 정관소식 독자들은 지금이라도 해당 글을 읽기 멈추기를.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양대산맥 산업화세력, 민주화세력은 소위 보수당인 ‘국민의힘’, 진보당인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며 정치적 성향을 계승해왔다. 필자가 보기엔 20대에게 더 이념정치는 구태정치에 불과하다. 냉정히 말하자면 기성세대가 부르짖는 짙은 추억을 20대는 책을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20대에게 보수, 진보의 가치는 무의미해졌으며 정치에 대한 불신과 낮은 효능감으로 공공 문제에 다소 둔감해지고, 개인의 공정과 정의 그리고 실효성이 중요해졌을 뿐이다.

  실제 20대인 필자의 주위에 보수, 진보의 이념을 계승하고자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공공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20대도 흔치 않다. 속보 경쟁에 다퉈 비슷한 내용을 쏟아내고 있는 언론 기사의 제목으로 20대는 세상을 얼핏 읽고, 한 장의 사진과 짧은 영상으로 20대는 세상을 얼핏 본다. 조간신문과 칼럼을 스크랩하면서 정독하는 일은 오히려 취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 사회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방안을 찾는 일은 공모전 출품작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얼핏 세상을 보는 20대에게 진보, 보수의 가치가 정립될 수나 있을까. 그 시간에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보면서 쾌락을 찾고 있지는 않는가,

  20대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있어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개혁의 중심에 서 있기를 바랐던 민주당의 강성 지지자들은 여전히 재·보궐 선거의 패배에 있어 스윙보터 역할을 한 20대의 변심(?)에 충격인 듯하다.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며, 현 정부를 세운, 어쩌면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지지 세력일 줄 알았던 20대가 어떻게 이리 쉽게 떠날 수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촛불을 들며, 박근혜 정부의 탄핵에 앞장선 당시의 10대이기도 했던 20대가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었기에 문재인 정부를 지지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공정과 정의가 상실해가는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대안으로, 양당제 성격을 강력하게 띠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대체재로 문재인 정부를 지지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의 향수를 추억하며 문재인 정부를 지지한 기성세대와는 다른 관점에서 말이다.

  20대는 진보적이지도, 보수적이지도 않다.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다. 이번 재·보궐선거의 결과만을 놓고 20대의 보수화를 주장하는 건 다소 섣부른 판단이라 생각한다. 조국의 시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켰던 현 정부에게 따끔한 일침을, 180석을 보유하고도 오히려 피부로 와 닿는 정책 결과를 내놓지 못한 현 정부와 여당에 경고를 했다고 생각한다. 즉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어 해당 결과를 표출했을 뿐, 20대는 애초 진보적이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았다.

  20대는 이제 능력주의를 천명하는 이준석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사회가 보다 각박해지고, 20대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데 여성, 청년 할당제 폐지를 주창하는 그에게 환호한다는 점은 다소 신기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를 냉철하게 바라본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우리가 제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지 말라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 달라는 20대의 성토라 본다면 씁쓸하지 않은가

  능력주의는 어쩌면 정당한 이유로 차별을 더 심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30대 0선 국회의원 이준석의 돌풍이 신선하면서도 우려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20대는 어느 때나 개인의 공정, 정의의 관점에서 본인의 삶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보완재나 대체재를 찾게 될 것이다. 골목을 누비며 악수를 청했던 정치인들에게는 경고의 목소리를, 매번 아웃사이더 역할을 자처하며 실효성을 외치던 활동가들에게는 희망의 목소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0대 역시 깨달아야 한다. 능력주의가 분명 대안이 될 수는 있으나 사회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결코 해소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개인의 이익도 중요하나, 사회가 온전치 않으면 결코 개인도 행복할 수 없음을. 얼핏 보는 사회로는 결코 우리의 삶에 직면할 수 없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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