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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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정관소식
  • 승인 2019.12.26 17:17
  • 조회수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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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심포니 지휘자 박부국의 음악 이야기

그때가 1989년 가을쯤이었다. 당시 부산대학교 지하철 역사 부근에 ‘카라얀도 죽는다’라는 포장마차가 들어섰다. 포장마차 이름치고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이곳은 대학 선배 중 한 분이 재미 삼아 차렸는데 우리 과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종종 들렀었던 추억이 어려 있는 장소였다.

요즘은 포장마차가 대부분 없어지고 입점 가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당시엔 포장마차가 많았었고 서민들이 힘든 하루를 마감하고 인생을 논하고 내일을 이야기하는 곳이었다.

카라얀, 그는 세계적인 지휘자라기보다 역사적인 인물이다. 음악 역사상 가장 큰 지휘자, 베를린 국립오페라 극장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형 지휘자, 어마어마한 음반 판매량과 전 세계적인 인기를 자랑했던 카라얀은 요즘 아이돌의 인기 규모와 큰 차이가 있었다. 카라얀이 죽었다는 뉴스를 접한 선배님은 포장마차를 차렸고 나는 카라얀의 일대기가 적힌 자서전을 읽게 되었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꿈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도 저런 지휘자가 될 수 있을까?

카라얀은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비엔나가 수도인 오스트리아는 독일 옆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국가이다. 언어는 독일어를 사용하며 게르만 민족의 혈통이다. 나는 지휘자가 되기 위한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 졸업식을 마치자마자 다음날 비엔나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엔나! 클래식 음악가들이 꿈꾸는 곳, 그 음악의 도시에 나는 젊음 하나를 믿고 첫발을 내디뎠다. 비엔나에서 유학하는 동안 카라얀에 대한 소문들을 듣게 되었는데 빈 국립오페라 극장에 카라얀이 지휘하는 날이면 음악팬들이 공연 전날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한다. 심지어는 극장 앞에 텐트를 쳐놓고 밤새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카라얀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카라얀의 지휘는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특이한 점은 그는 지휘할 때 항상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지휘법이다. 대형 공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는 눈을 끝까지 감고 연주를 한다. 그래서 극적인 긴장감과 집중을 얻어낼 수 있으며 관객들에게도 무수한 소문들을 만들어 낸다. 지휘계의 제왕이란 별명을 얻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아무나 카라얀처럼 연주 시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카라얀의 연주 비디오를 많이 감상했던 나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비디오 그 어디에도 그의 전신이 비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그의 상체만 보일 뿐이다. 1984년 한국에 내한 공연을 왔었는데 그때 그를 직접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카라얀은 키가 매우 작다! 170cm도 안 된다고 하니 유럽인치고는 매우 작은 키다. 그래서 일부러 상체만 찍게 하였으며 실수로 하체가 방송되면 촬영 감독을 교체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라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당원으로 활동한 이력으로 훗날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그늘에 가려 빛을 발휘하지 못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카라얀은 거장으로서 지휘계의 최고 자리에 확고히 서 있다.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를 능가하는 자가 없다. 1989년 7월 베르디 가면무도회의 레코딩을 마치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자그마한 키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유럽 전체의 음악계를 쥐고 흔들었던 카라얀!

수없이 많은 공연과 음반들 그리고 전설들을 만들어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는 아직 내 방의 피아노 위에 큰 사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나 또한 지휘자로서 카라얀의 리더십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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