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실, 날실 그리고 길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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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실, 날실 그리고 길쌈
  • 정관소식
  • 승인 2019.12.2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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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짜는 여인(고구려 대안리 1호분)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옷깃을 여미고 코트, 패딩점퍼를 꺼내어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한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이기기 위해 어떤 옷을 입었을까? 따뜻한 목화솜은 고려시대 말에 들어왔으니, 삼국시대 사람들에게 겨울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아주 모진 계절이었으리라.

옷은 추위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탄생하였는데, 최초의 옷은 나무 잎사귀와 동물의 가죽과 털로 만들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길이가 짧은 짐승의 털이나 솜털을 가지는 식물을 꼬아 길고 질긴 실을 자아낼 수 있는 가락바퀴를 발명하였다. 가락바퀴를 이용한 ‘실’의 발명은 씨실과 날실을 엮어 옷감을 짜는 길쌈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을 뽑고 씨실과 날실을 엮어 옷감을 짜는 길쌈은 매우 중요한 생업활동이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약 2,300여 년 전 베를 촘촘하게 짜기 위해 사용하는 베틀의 부속구와 실패, 그리고 삼베를 만드는 삼의 씨앗이 출토되어 당시 발달된 길쌈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신라 혁거세왕은 누에 기르기를 장려하였으며, 유리왕은 여자들을 두 패로 갈라 길쌈 시합을 벌여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편을 대접하는 ‘가배’를 시행하였다.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내린 여인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모습이 그려진 고구려 고분벽화와 왜에 직공을 보내어 직조 기술을 가르친 백제 고이왕의 이야기로 보아 삼국시대 사람들은 베틀을 이용하여 능숙한 솜씨로 다양한 옷감을 마련하여 옷을 지어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단은 바다 건너 ‘왜’에까지 수출되는 중요한 교역품이었다. 일본 정창원에서 우연히 발견된 ‘신라민정문서’에는 7세기 말 오늘날의 청주 인근 4개 촌(村)의 면적, 인구, 논과 밭, 가축의 수 등 다양한 정보를 상세하게 적고 있다. 누에치기에 빠질 수 없는 뽕나무의 수량도 꼼꼼하게 적혀있는데, 4개 촌에 무려 4,000그루 이상의 뽕나무를 심어 관리하였으며 연간 200필 이상의 비단을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귀족들은 비단이나 실을 아주 가늘게 뽑아 곱게 짠 겸포(縑布)로 옷을 만들어 입고, 겨울이 오면 동물털로 짠 모직물과 동물 가죽과 털을 이용한 겉옷까지 챙겨 입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그들이 만든 비단옷은 입지 못하고 갈포(葛布)로 불리는 거친 실로 짠 베옷을 주로 입었으며, 추운 겨울에도 얇은 베옷을 여러 겹 겹쳐 입는 수밖에 없었다.

고려시대 말,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솜은 얇은 베옷만으로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에게 무엇보다도 큰 선물이었다. 문익점과 그의 장인 정천익이 시험 재배에 성공한 이후 약 10여 년 만에 목화재배법이 전국으로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은 ‘따뜻한 겨울나기’가 백성들의 큰 숙원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신동조(정관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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