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흔히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고 회고하는 연말이다.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지난 한 해를 반추할 시간이 잦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맘때쯤이면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다. 전깃불도 없이 호롱불 밑에서 음력을 주로 쓰던 시절의 이야기다. 섣달그믐 날, 어머님께서는 형제들을 불러 모아놓으시고, 오늘 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거나 굼벵이가 된다며 잠을 자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은 윷놀이나 화투 등으로 게임을 하거나 고구마, 홍시 등 음식을 나눠 먹으며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막내인 필자는 나이가 어려 게임에도 끼지 못하고, 체력에도 한계를 느껴 눈꺼풀이 내려앉는 걸 참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러다 형제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는데, 누님이 보여주는 거울을 보니 눈썹이 하얗게 세어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만 엉엉 소리를 내어 울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알고 보니 잠든 사이 형제들이 눈썹에 밀가루를 칠해 눈썹이 세었다고 장난을 친 것이었다.
이런 풍습은 우리 조상들이 한 해를 보내며 지켜온 ‘수세(守歲)’, 곧 ‘해 지킴’이라는 세시풍습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옛 연말 풍습은 섣
달그믐 날이면 방과 뜰, 부엌과 장독대, 측간과 뒤뜰까지 어느 한구석 어두운 곳 없이 집안을 대낮처럼 밝게 불을 켜놓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며 조왕신(竈王神)의 하강을 경건하게 기다렸다. 집 부엌에 머물며 길흉을 관장한다는 조왕신은 1년 내내 그 집안사람들의 말과 행동 등 선악을 낱낱이 지켜보았다가 섣달 스무 나흗날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보고한 다음, 평가서를 들고 섣달그믐 날 밤에 다시 내려오는 것으로 믿었다. 한 해 동안 살아온 종합평가 결과에 따라 이듬해 복을 점지받는 풍습 아래서 우리 조상은 복을 가지고 내려오는 조왕신을 경건하게 맞이하려는 마음에서 집안 곳곳에 불을 밝혔던 것이다.
또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 날 밤을 ‘제석(除夕)’ 혹은 ‘제야(除夜)’, ‘별세(別歲)’라고도 불렀는데, 다른 사람에게 빚이 있는 사람은 새해가 오기 전에 모두 갚았으며, 남에게 받을 빚이나 외상이 있는 사람은 섣달그믐날에 찾아다니며 받았다고 한다. 섣달그믐 날 빚을 받지 못했을 때는 정월 대보름까지는 빚 독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남에게 갚아야 할 돈이나 꾸어 쓴 돈, 외상값 따위는 그해에 깨끗이 정리를 한 후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경건하게 맞이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 옛 풍습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사라진 수세(守歲) 대신으로 나타난 풍습이 망년회(忘年會)와 송년회(送年會)이다. 망년회는 글자 그대로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그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자는 뜻으로 베푸는 모임’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1,400여 년 전부터 ‘망년(忘年)’ 또는 ‘연망(年忘)’이라 하여 섣달그믐께 친지들끼리 어울려 그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기 위하여 술과 춤으로 흥청대는 세시 민속이 있었으며 이것이 망년회의 뿌리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망년회를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이후 우리나라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전파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망년(忘年)’은 ‘나이 차이를 잊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비록 나이는 어리더라도 그 사람의 재주나 인품이 뛰어나면 나이를 가리지 않고 서로 사귀는 것을 ‘망년지교(忘年之交)’라 했다. 이와 같은 한자어 ‘망년(忘年)’이지만 일본과 우리나라에서의 쓰임새는 상당히 달랐다.
망년회가 일본식 한자이여서 순화된 용어가 송년회이다. 국어사전에서 송년회는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베푸는 모임’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망년회는 한해에 있었던 괴로움을 잊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송년회는 한 해를 돌아보고 정리하여 반성하는 것이 주목적이라 할 수 있다. 흥청망청 술을 마신다고 해서 괴로움은 잊혀 지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동안은 잠시 잊혀 질지는 몰라도 몸만 상하게 되고, 나아가 폭음에 의해 발생하는 각종 사건·사고만 늘어날 것이다. 삶에는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 고해(苦海)’라 하지 않던가. 이는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어난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 반성할 것은 반성하면서 앞날을 대비해 나가는 것이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하지 않겠는가.
이제 연말을 맞아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창회, 각종 사회단체 등을 가리지 않고 송년회가 열리는 시기이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보낼 것이 아니라, 차분히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의미 있는 모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모임에서 건배사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올 한 해 마무리 잘하시고, 내년에도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든지 이루시라”는 의미를 담은 송년회 건배사로 ‘마무리!’는 어떠하실는지.
=하종덕(전 부산광역시 서구 부구청장)=